영국은 유럽 대륙과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둔 섬나라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의미하는 팍스 브리태니커 시정 영국은 수많은 식민지들을 통해 전 세계의 3할을 통치했다. 하지만 과거 대영제국의 영화는 미국의 독립, 1차 대전, 2차 대전의 삼중고를 거치면서 점차 사라져 갔다. 일단 영국은 미국과의 정치 경제적 관계를 지속하면서 브레튼 우즈 시스템 하의 고정 환율 시기를 거친다. 덕분에 194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4~8% 정도의 금리 수준, 평균적으로는 약 6% 정도의 금리 수준으로 경제를 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71년 미국의 금태환 중지 선언 이후 1973년부터 세계 경제는 천지개벽을 했다. 즉, 서유럽권의 새로운 완율 제도인 공공 변동 환율제도가 대두되었고, 여국은 1972년부터 자유변동환율제로 독립해 떨어져 나갔다. 1971년 당시 영국의 경제는 제조업이 쇠락해 가면서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독일과 큰 대조를 이룬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자동차 산업과 청강 산업이 점점 부진에 빠진다. 이것을 바로 영국병이라고 부른다.
영국병의 원인은 2차 대전 이후 중산층 계급의 몰락이다. 중산층은 경제 발전과 사회 안정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요약이다. 즉, 집과 안정적 일자리를 가진 중산층이 두터워질수록 유효 수요, 구매력을 가진 소비층이 확대되어 내수 시장이 강화된다. 또한 잃을 것이 많은 이들이 중산층이고, 게다가 이들은 부자가 되고자 하는 발전 지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정부의 정책에 협조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므로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그 사회는 불안해진다.
영국 정부는 중산층 복구에 발 벗고 나섰고 이를 위해 주로 복지 정책에 예산을 투입해 갔다. 이는 전통적으로 복지를 강조하였던 영국의 정치 철학에 기인한 것이다. 2차 대전 중이던 1943년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After the War'라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전후 복구 프로그램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때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북지 슬로건을 내걸게 된다. 하지만 복지가 강도되다 보니 자연스레 성장을 위한 투자는 미진할 수밖에 없었다. 복지 드라이브가 걸리면서 노동자 계급의 노동조합은 이해 사항이 대치되면 곧바로 파업을 벌이곤 했다. 당연히 영국의 생산성은 크 폭으로 하락하게 된다. 기업의 투자 의지가 약화되었음은 불문가지다. 결국 비효율적인 생산성 문제로 영국 제조업의 경쟁력은 급속히 약화되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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