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8월 카터 대통령은 볼커(Pual A. Volcker)를 미 연준의 새로운 의장으로 임명했다. 달러화 가치 우지라는 특명을 받은 이가 볼커 미 연준 의장이다. 그는 1969~1974년까지 닉슨 행정부의 재무 차관을 역임했고, 75년부터 뉴욕 연방은행 총재를 거쳤다. 또한 1971년 금태환 정지와 스미소니언 체제를 이끌어 냈던 주역이기도 하다. 특히 강력한 통화 정책이야말로 금태환에 우선 되어야 하고 따라서 1976년 변동 환율 제도로 이행하는 것이 시대의 요구라고 믿었던 인물이다.
그가 미 연준 의장으로 취임했었던 1979년은 인플레이션이 13.3%에 달하던 해였다. 그야말로 인플레이션이 창궐했던 시절에 미 연준 의장이라는 중책을 떠맡은 것이다. 그동안 베트남 전쟁과 오일 쇼크가 맞물리는 상황에서 미 연준은 어쩔 수 없이 안정성보다는 성장에 방점을 두어야만 했었다. 이는 곧 미 연준 의장이 취임하기 직전 미국은 남미처럼 만성 인플레이션으로 무너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젖어들었다. 그러했기에 카터 행정부는 신뢰를 잃어갔다. 이제 그가 다시 그 신뢰를 복구해내야만 한다. 최강의 인플레이션 인파이터 볼커 미 연준 의장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1970년 대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물가는 언제나 상승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이 뇌리에 박혀 있었다.
인플레이션의 원인은 베트남 전비로 풀려나온 유동성과 오일 쇼크로 인한 인플레이션이었다. 모든 미국인들이 인플레이션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고착화될 경우 미 달러화 가치가 지속적으로 하락해 미국의 무역 수지 적자는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무역 수지는 적자분 만큼 다른 나라들의 경제 성장률로 이전될 것이기에 당장은 별다른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미 달러화가 기축 통화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면 그 엄청난 무역 수지는 미국에 위험을 수반하게 된다. 따라서 기축 통화의 자리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다. 볼커 미 연준 의장은 적당한 수준의 금리 인상으로는 도저히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러한 판단을 했다. 기준 금리를 조절하는 것보다는 통화량 자체를 조절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이에 급격한 기준 금리 인상을 통해 시중 유동성을 줄이고자 했다. 만약 볼커 미 연준 의장마저 실패한다면 미국 내 인플레이션은 만성 질병이 될 것이고, 달러화 패권 역시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 것이었다. 그가 취임하기 전 실업률은 5.8%로 외견상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인플레이션에 베팅하고 있었기에 미 달러화는 나날이 평가절하되어 갔다. 이러한 통화 가치의 약세는 또다시 인플레이션을 다시 부풀리는 악순환을 거듭했다. 이에 볼커 미 연준의 장은 이렇게 선언했다. 시장 금리는 미 연준의 정책 금리 의지가 아니라 철저히 시장의 수요와 공급으로 자율 결정한다. 1979년 10월 6일 토요일 밤에 미 연준의 재할인율 죽, 민간 은행에 금융 지원해주는 이자를 무려 12%로 인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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