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냐의 탄생
역사는 흐르고 흘러 1479년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가 결혼해 에스파냐가 탄생한다. 이들은 1492년 1월 2일 이베리아 반도 남부 안달루시아에 위치했었던 이슬람 왕국 그라나다를 패망시켰다. 이로써 이베리아 반도 내 이슬람 세력은 화려한 알람브라 궁전만을 마지막 불꽃으로 남긴 채 서유럽에서 완전히 퇴장하게 된다.
1492년은 이탈리아인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해이기도 하다. 1452년 동로마 멸망 이후 사라센이 지중해의 패자로 등극하면서 뱃일이 끊기자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신성 에스파냐의 대항해 사업으로 몰려들었다. 콜럼버스는 이들의 자화상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코르테스와 피사로는 마야와 잉카를 후벼 파내 금과 은을 뽑아낸다.
이제 남미의 금과 은이 에스파냐로 물밀 듯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다. 에스파냐는 신의 햇살로 반짝이는 신성의 국가로 그들의 고귀한 신에게 찬양을 올린다.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 사이에서 차녀로 태어난 후아나 1세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펠리페 1세와 결혼하게 된다.
펠리페 1세
펠리페 1세의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다. 후아나 1세는 카스티야 지역뿐만 아니라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함께 상속받은 상태였다. 공교롭게도 친오빠인 후안 왕세자가 사망한 후 친언니이자 신생 포르투갈 왕가로 시집간 이사벨 왕비 역시 사망하고 만다.
펠리페 1세는 후아나 1세에게 염증을 느끼고 오늘날 프랑스 동북부와 벨기에 그리고 네덜란드에 걸쳐 있는 자신의 영지 플랑드르로 돌아가 버린다. 플랑드르까지 쫓아간 후아나 1세는 결국 사랑을 받지 못하고 주술 등에 빠지게 된다. 이 당시 광기 어린 여왕이라는 악명이 붙은 정도로 정신적 불안 증세를 보인 것으로 유명하다.
1504년 어머니인 이사벨 1세가 사망하자 후아나 1세는 카스티야, 나폴리, 시칠리아 등의 여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이자 합스부르크의 상속자인 펠리페 1세가 섭정을 함으로써 펠리페 1세가 그녀를 대신해 이베리아 반도를 비롯해 나폴리 및 시칠리아 왕국을 장악해 버린다. 광녀 후아나 1세가 바로 격동의 시대를 한 복판에서 부딪혀야 했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바를 5세의 어머니다.
미국 탄생의 시초 - 카를 5세
미국이 탄생하는 그 길에는 같은 시대를 격렬하게 부대껴 갔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그리고 영국의 헨리 8세라는 세 명의 걸출한 군주가 함께 부대껴갔다. 이제 이들의 삼각구도를 살펴보자.
먼저 카를 5세와 프랑수와 1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위를 놓고 경쟁했던 사이였다. 이 당시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의 후광을 등에 업은 카를 5세가 오늘날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계승권을 물려받았다. 아버지 펠리페 1세로부터는 네덜란드 벨기에 지역을 아우르는 플랑드르 지역과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그리고 어머니 후아나 1세로부터는 에스파냐와 나폴리와 시칠리아 등의 이탈리아 영토의 상속권을 물려받게 된다.
이는 만약 이탈리아에서 영토 분쟁이 발생한다면 카를 5세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로마 교황이 있다. 한 마디로 그는 유럽의 동쪽 끝과 서쪽 끝을 장악한 인물이고 그 사이로 프랑스를 지키는 프랑수와 1세가 있다. 바다 건너로는 영국의 헨리 8세가 포진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일생은 무거운 짐들만이 잔뜩 놓여 있을 따름이었다.
유럽 한 복판의 황제로서 카를 5세는 오스만 튀르크의 침공을 온몸으로 막아내야 했고, 제국의 내부적으로는 마틴 루터가 던져대는 종교 개혁의 파편을 그대로 뒤집어써야만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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