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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 음악 역사

카롤링거의 2대왕 샤를마뉴 대제

by 미끄덩덩 2021. 12. 17.

오늘날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시조로 치자면 카롤링거의 2대 왕인 샤를마뉴 대제를 꼽을 수 있다. 비록 자신은 일자무식이었지만 금, 구리, 은 등이 혼용되던 서유럽에서 은본위제를 정식으로 채택해 교환 가치의 기준을 제시한 인물이 바로 샤를마뉴 대제이다.

샤를마뉴 대제의 업적

또한 왕궁 아카데미를 열어 중세를 관통하는 리버럴 아츠(liberal arts) 일곱 개 과목인 라틴어, 수사학, 변증법, 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의 기초를 다지게 되고 서적을 출간시킨 위대한 인문 왕이기도 하다. 샤를마뉴 대제는 피레네 산맥에서 이슬람 세력을 철저히 봉쇄해 냈다. 만약 그 당시 피레네 산맥이 뚫렸었다면 오늘날 프랑스마저 이슬람 왕국으로 변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연히 유럽인들 입장에서 대제라 숭상할 만한 인물이다.

 

샤를마뉴 대제와 로마 교황청과는 상호 윈-윈 관계였다. 서로마 붕괴 이후 로마 제국의 명백한 후계자는 동로마 제국이었고, 콘스탄티노플의 위명은 로마 교황청을 압도하는 듯했다. 그러한 만큼 로마 교황청은 서유럽의 신성 샤를마뉴 대제의 위명을 빌어 콘스탄티노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 이름 속의 마르텔은 곧 그의 주 무기였던 망치 모양의 무기로 카를 마르텔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의 무력을 상징한다. 이는 곧 로마 교황청에게 필요한 군사력을 지원하는 힘이었다.

 

799년 교황 레오 3세가 전임 교황 하드리아노 1세 세력으로부터 암살 위험에 노출된다. 이 당시 레오 3세의 신변을 지켜준 이가 샤를마뉴 대제였다. 이듬해인 800년 레오 3세의 교황권을 확립시켜 준 대가로 서로마 황제의 칭호인 아우구스투스의 명예를 품에 안게 된다. 서쪽으로 무어인들을 막아내고 동쪽으로는 유목계 이민족에게 시달리던 로마 교황청을 수호한 공적이 컸다. 이렇듯 기독교 세계를 구해낸 인물이었기에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던 것이다.

롤랑의 노래

이러한 전쟁의 와중에서 대서사시 롤랑의 노래가 전해진다. 샤를마뉴의 호위무사 격인 12인의 기사 팔라딘은 샤를마뉴의 망치로 그 위명을 날렸었다. 롤랑은 팔라딘이자 샤를마뉴 대제의 조카로 그 용맹을 떨쳤던 인물이다. 오늘날 산티아고 순례 길의 성지로 유명한 론세스바예스 전투에서 샤를마뉴 대제는 크게 패하고 만다. 이때 롤랑은 출구 작전의 후미를 맡게 된다. 군사 교리 상 출구 작전을 수행한 것이다. 출구 작전이란 주력 부대의 퇴각 시 후위를 맡는 임무로 어디까지나 전방의 주력부대가 무사히 본진으로 귀대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다라서 모든 포화를 대신 얻어맞아야 하는 역할을 떠맡는다.

 

아니나 다를세라 사라 세인들의 잠복 작전에 걸려 본진의 후미를 호위하던 롤랑과 그의 부하들은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그는 본대에게 구원을 요청해 수많은 목숨들을 꺼뜨리기보다는 왕의 무사귀환을 위해 스스로 전사하는 길을 택했다. 이러한 그의 기상은 훗날 유럽 기사도의 원형으로 추앙받게 된다. 그 슬픈 용맹을 노래한 것이 바로 롤랑의 노래라 하겠고, 우리의 역사에서는 관창의 눈물에 비견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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