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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 음악 역사

중국이 종용했던 스리랑카 함반토타 항구

by 미끄덩덩 2022. 2. 7.

스리랑카의 함반토타 항구의 개발

1972년 국호가 스리랑카로 바뀌었으나 그 안에 있던 양 민족 간의 갈등은 꺼지지 않고, 정치 갈등으로 번져갔다. 결국 1930년 7월 14일 타밀족이 정부군에 반해 내전을 일으켰다. 타밀족이 동부 해안가에서부터 북쪽에 밀집해 살고 있었으므로 내전은 역시 북동쪽 방면에 치우쳐 벌어졌다. 인도 본토에 1억 명에 달하는 타밀족이 함께 봉기할까 두려운 인도 정부는 스리랑카 정부군을 지원했고, 중국은 무기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를 통해 스리랑카 6대 대통령을 역임하게 되는 라자팍사는 정부군을 지휘하며 중국 수뇌부와 자연스레 친밀도를 높여 갔다. 점차 정부군이 승기를 잡아간다. 중국 역시 지속적으로 라자팍사 대통령을 지원했던 대가를 거두게 된다.

라자팍사 전 대통령의 고향

라자팍사 전 대통령의 고향이 바로 함반토타다. 함반토타항은 스리랑카의 동편에 위치해 있다. 즉, 인도양이 아니라 남태평양 쪽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따라서 중국이 태국에서 뚫고 있는 크라(Kra) 운하를 동편에서 서편으로 건너간 후 인도양이 남쪽 방향으로 항해해 가면 스리랑카의 동편에 위치한 함반토타 항구에 닿는다. 따라서 함반토타항은 진주 목걸이의 중간 기점에 해당하는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한다. 스리랑카 내전이 끝나 가자 라자팍사 대통령은 함반토타 항구 개발에 착수했다. 내전에 끝난 후 인도의 견제를 받는 섬나라 스리랑카에 차관을 대여해 줄 국가는 없었다. 전통적인 우방국 중국만이 3%의 이율로 3억 700만 달러의 차관을 빌려주었다. 물론 차관의 조건은 중국 국영기업을 건설사로 선정하는 것이었다. 스리랑카에 대여했던 차관은 공사 대금의 명목으로 중국으로 재 유입되었다.

 

하지만 함반토타 항구 앞에 거대한 암초가 큰 덫이었다. 라자팍사 대통현은 유조선이 자유롭게 입출항이 가능한 함반토타 항구를 꿈꾸었지만 막상 뒤늦게 발견된 암초 때문에 대규모 유조선은 입항이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게 된다. 하지만 라자팍스는 2011년 정치적 유세를 위해 서둘러 함반토타 항구를 개장시켰다. 결국 4,000만 달러의 비용을 들여 암초를 제거해야만 했다. 약 3억 달러의 차관 중 4천만 달러를 암초 폭파 비용으로 허무하게 날려버린 것이다. 암초의 존재와 그 폭파 비용을 미리 알았다면 좋았겠으나 스리랑카는 그러한 능력도 없이 일을 벌였었다. 물론 그 뒤에는 사업을 종용했던 중국이 있었다.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2012년 함반토타 항구의 입항 실적은 고착 34척에 불과했다. 동년 스리랑카의 서편 인도를 향해 위치해 있는 수도 즉, 콜롬보항에 3,700척이 입항했던 것에 비해 그야말로 낮은 수준이었다. 내전의 상처가 끊겨버린 교통 인프라로 고스란히 남아 있던 곳이 함반토타 항구였다. 도로 및 철도 인프라를 재건하기도 전에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함반토타 항구를 개발시켰으니 제대로 진행될 리가 없었다. 물류를 운반하려야 운반할 수가 없었던 상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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