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의 금태환 중지 선언 이후 추락할 듯했었던 미 달러화의 가치였지만 페트로 달러 기능을 발판 삼아 완벽히 부활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미국은 1976년 과감하게 각 국의 통화가 자유 변동하도록 보장하는 킹스턴 체제를 채택했다. 이 당시 킹스턴 체제를 밀어붙였던 미국의 선택 이유를 알아보자.
먼저 미국이 봉착했었던 상황은 다음과 같아. 중동발 인플레이션으로 미국 내 인플레이션이 치솟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킹스턴 체재를 선택한 이유는 3가지다.
- 인플레이션으로 미 달러화 가치가 하락하는 와중에 스미소니언 체제에 준한 금 태환성을 보장하고 싶지 않았다.
- 달러화 환율이 자유 변동할지라도 페트로 달러 기능에 의해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달러화를 지속적으로 벌어들여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손해 볼 것이 없다.
- '이자율→환율→이자율→환율' 공식은 미국이 달러화 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 채찍으로 요긴하다. 더 이상 정부 지출에 의존하기보다는 이자율 정책으로 달러화 가치를 조절해 나가겠다.
갑작스러운 변화였지만 다수의 국가들이 자의 반 타의 반 따를 수밖에 없었다. 3년 후인 1978년 12월 이란의 호메이니가 석유 수출 금지 및 감산을 주도함으로써 2차 오일 쇼크가 발생했다. 그다음 해인 1979년 2월 11일 호메이니는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성립시켰다. 그 결과 1978년 배럴 당 약 12,7 달러 정도였던 중동산 유가가 무려 30달러를 돌파해 버린다. 이로써 2차 오일쇼크가 발생한다.
이제 전 세계 인플레이션은 따 놓은 당상이다. 현대 산업의 주원료인 원유 가격이 폭등했으니 모든 산업 부문에 있어 비용 견인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당장 겨울에 난방유 가격이 비싸져 야채 값이 오르게 된다. 그 당시 중화학 공업에서 탈피하지 못했던 우리나라의 경우 경제가 초토화되어 그야말로 극심한 불황에 빠지게 된다. 오일 쇼크의 충격이 배가되었던 시대적 요인은 1964년 미군의 베트남전 참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5년까지 끌었던 베트남전은 미 행정부로 하여금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게 만들었고, 이렇게 풀린 통화는 1차 오일 쇼크와 만나면서 슈퍼 인플레이션으로 폭발하고 만다. 여기에 유가를 기반으로 하는 현대 산업 구조 자체가 붕괴 직전까지 내몰리면서 경기는 침체되고 물가만 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을 낳았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하에 달러화 가치 유지에 큰 부담을 느낀 미국은 결국 1976년 킹스턴 체제를 도입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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