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 고구려의 공방
371년 백제와 평양성의 전투에서 고구려는 고국원왕을 잃었다. 그 원한을 풀기 위해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소수림왕이 즉위한 후 율령을 반포했다. 불교를 공인하고 태학을 설립하는 등 안으로 국가 체제를 정비하면서 문화 국가로 발돋움하는 일대 전환기를 마련했다. 이와 같이 내실을 다져 나가며 이를 기반으로 외정을 행하여 백제를 군사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위협을 느낀 백제도 진사왕 2년(386년)에 청목령(개성)에서 팔곤성을 거쳐 4해에 이르는 지역에 군사를 내어 고구려의 남쪽 경계를 침략하기도 했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의 접경 지역은 수곡성(황해도 신계) 치양(백천) 일대에서 서로 공방이 치열했던 것이다. 그러나 광개토왕이 즉위하며 백제는 고구려에 일방적으로 압도당했다.
광개토왕 1년(392년)에 백제 10성을 점령하고 백제도 이를 회복하기 위해 아신왕에 군사를 보냈으나 실패했다. 광개토왕은 396년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했기에 아신왕은 남녀 1천 명과 세포 1천 필을 바칠 것을 약속하고 항복했다. 이 강화를 받아들인 광개토왕은 왕의 동생과 대신 10여 명을 인질로 데리고 물러갔다. 백제는 이후 주변 국가와 동맹 관계를 맺거나 군사력을 재정비하면서 빼앗긴 영도의 재탈환에 나섰다. 아신왕 6년(397년)에는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눌지를 볼모로 보냈으며 이후 왜국과 수차례 사신을 교환하며 우의를 다졌다. 또 비류왕 7년(433년)에는 고구려의 압박에 대처하기 위해 신라의 눌지왕과 제휴하기도 했다. 이처럼 외교적 동맹 관계를 펴면서 안으로는 쌍현성, 사구성 등 새로운 성을 쌓고, 병마를 동원하고 병력을 훈련시키는 등 군사력을 재정비해 나갔다.
아신왕 13년(404년)에 왜군과 합세하여 옛 대방군 지역(황해도)으로 진출하려다 실패했고 오히려 58성을 뺏긴 후 한강 이북 청목령(개성)까지만 회복했다. 고구려는 장수왕 15년(427년),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긴 후 본격적인 남진 정책을 펴며 백제와 신라를 압박했다. 에에 나제는 동맹을 맺었다. 백제 개루왕은 18년(472년)에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의 남침 위협을 호소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실패했고 오히려 고구려에 침공 구실을 주어 장수왕은 475년 3만 병력으로 백제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고 개루왕은 죽었다. 이에 백제 문주왕은 웅진으로 천도하여, 하남의 주인은 고구려로 바뀌었다.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는 충청도, 전라도 지역을 국가 기반으로 흡수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정치적 안정을 꾀했다. 그러면서 중국의 남조와 우호 관계를 맺어 고구려를 견제하고 신라와 결혼 동맹까지 맺어가면서 고구려의 남침에 대응했다. 그리고 성왕 때 국력이 급격히 신장되어 왕도를 웅진에서 사비성(부여)으로 옮기고 관제를 개편했다. 또 불교의 진흥을 꾀하고 왜국에 문화를 전수해 주는 등 문화 진흥책을 바탕으로 외교를 강화했다. 정치, 군사적으로도 힘을 키워 동왕 29년(551년) 신라 진흥왕과 동맹하여 북진을 시작했다. 한성(하남), 북한성(서울) 등 한강 하류 6군의 땅을 수복했다.
신라가 하남의 주인이 되다
잃었던 땅을 되찾은 백제는 다시금 한강 유역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듯하더니 년 후 동맹국 신라가 동명을 깨고 한강 유역을 탈취하자 이 지역의 주인은 다시 신라로 바뀌었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정복한 직후 곧바로 이 지역에 신주를 설치했다, 그 주치소는 백제의 도읍지였던 하남의 이성산성이 아녔겠느냐는 것이 가장 유력한 학설이다. 그리고 이 지역의 유구와 유물은 이를 증명하는 뒷받침을 하고 있다. 즉, 한양 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85년부터 발굴 조사된 보고에 의하면 신라 석성지가 발굴되었다는 것으로도 신라가 이 지역을 중요시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한 신라는 문무왕2년(673년)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다고 했다. 이는 당나라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주장성의 위치가 지금의 남한산성인 점으로 미뤄보아 한산주는 이 부근이고 한산주의 주치소는 남한산성이었을 것이다.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나당 연합군은 서로 다른 속셈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당나라는 신라까지 멸망시켜 귀속시킬 속셈이었고, 신라는 한반도에서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려 했다. 그러니 자연 충돌을 면하기는 어려웠다. 때문에 각지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으나 최후로 지벌포(금강하구) 해전에서 패한 당군은 신라와의 전투를 포기하고 물러남으로 677년 마침내 신라는 삼국 통일의 위엄을 달성하게 된다.
하남의 삼국 시대 백제가 통치하던 기간이 가장 길고 나름대로 문화의 꽃을 피웠으나 삼국의 각축장으로 많은 전화를 겪어 문화 유적은 거의 전부 멸실되어 학문적 뒷받침이 안 되는 것이 아쉬운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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