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이후 미국의 눈에서 본 세계 경제를 살펴본다. 먼저 러시아에 의한 공산주의 세력이 동구권을 포함해 베를린의 절반을 확보했다. 동아시아에서는 한반도의 절반을 차지했다. 물론 미국에 일본이라는 방어선이 매우 중요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반대로 말해 한국은 사건이 발생하기 쉬운 지역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만약 실제 사건이 일어날 경우 일본을 거점으로 방어선을 확보하면 된다.
이는 1950년 미 국무장관 애치슨(D. G. Achesson, 1893~1971)이 제안한 애치슨 선언으로 구체화된다. 미국의 극동방위선의 경우 타이완에서 일본 오키나와를 연결하고, 서쪽으로는 필리핀을 연결하는 방어선임을 공식화시켰다. 거기서 한반도는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되었다. 여기서 역사의 슬픈 조각을 잠시 들추어야 한다.
1943년 11월 22일~26일 동안 이집트의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의 루스벨트와 영국의 처칠 그리고 중화민국 장제스가 2차 대전 후 일본이 지배하던 아시아 지역에 대한 전후 처리 문제로 회담을 갖는다. 중국을 반분하던 장제스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눈에 차지 않는 소수 집단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윤봉길(1908~1932) 의사의 의거 이후 장제스는 조선인에 대해 높이 평가하면서 전향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한다. 장제스의 아내는 오늘날 상하이 와이탄 일대의 고풍스러운 건물 일대를 소유했던 금융 거부 쑹자수(1863~1918)의 셋째 딸 쑹메이링이다. 쑹자수의 세 자매는 중국 근현대사에 여인의 향기를 깊게 남기고 갔다. 큰 딸 쑹아이링은 상하이의 금융가와 결혼해 '돈을 사랑한 여인'으로, 둘째 딸 쑹칭링은 중국의 국부라 불리는 쑨원과 결혼해 '중국을 사랑한 여인'으로, 그리고 막내딸 쑹메이링은 장제스와 결혼해 '권력을 사랑한 여인'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쑹칭링과 쑹메이링은 미국 유학파로 특히 사교적이었던 쑹메이링은 미국 생활 중에 비행기에 크게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이력으로 그녀는 미국과 협력해 중화민국 공군을 창설한 주인공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 덕분에 대만 최초의 공군참모총장은 쑹메이링이 역임한다. 장제스는 윤봉길 의사의 서거 어후 조선일들을 위한 공군 학교에 한국인의 입학을 허락했다. 1기 졸업생이 바로 김구 선생의 아들이자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故 김신(1922~2016) 장군이다.
조선에 대한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던 장제스는 카이로 회담 당시 조선의 독립국 지위 부여를 옹호했다. 물론 독립국 조선을 자신의 영향력 휘하로 편입시킬 심산이었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시거를 질겅질겅 물고 씹으며 특유의 허세를 떨던 처칠 수상은 조선의 독립국 지위에 대한 가능성 자체를 일축하며 강력한 의구심을 표출했다. 카이로 회담 이후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러시아가 한반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남과 북이 분단되는 비극적인 역사의 수레바퀴가 움직여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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